1930년대 음반자료의 목록을 보노라면 ‘넌센스’, ‘스케취’란 장르의 음반들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낯선 이 음반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대개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믹한 것들이 많습니다. 삶에 풍부하게 넘실거려야 할 웃음이 수탈과 유린의 식민통치 속에서 현저히 사라져버린 세월, 당시 주민들은 가족과 고향의 주변 환경을 돌아다보면 그저 눈물과 탄식,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우울증의 확산은 지식층으로 하여금 점점 강한 자극과 감각으로 무디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음반제작과 발매에 종사하던 담당층들은 반드시 가요음반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음반도구가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넌센스, 스케취 등 속의 음반입니다. 이 음반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주로 식자층, 지배층의 모순된 삶과 부조리에 관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일본의 퇴폐적인 성 풍속과 향락산업이 식민지조선으로 흘러 들어와서 세상을 더더욱 혼탁하게 휘몰아갈 때에 민중들은 그들에 대한 풍자와 냉소와 더불어 비판까지 다룬 음반인 넌센스와 스케취 따위를 들으며 시원한 통쾌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음반의 출현을 외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의 충돌과 굴절 속에서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자료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이 종류의 음반에는 당대의 풍속과 문화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소화(笑話), 혹은 막간극이 무대에서 인기를 얻어가자 음반사들은 재빨리 이에 대응하여 넌센스, 스케취류의 음반을 제작 생산했습니다.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음산한 시절에 이처럼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웃음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값진 도구인지 모릅니다. 유명한 인류학자 노드롭 프라이교수는 웃음이란 것이 맹목적인 비난과 풍자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지점이라는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넌센스, 스케취가 유발하는 웃음의 세계에 빠져있는 동안 현실의 모순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난이나 풍자의 선택은 감상자 스스로가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음반사에서 넌센스 음반의 최초는 언제부터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1932년 2월경으로 보입니다. 당시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레코드부부>란 제목의 넌센스 음반을 2매로 발매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김영환와 김선초, 강석연 등입니다. 이 음반이 기록으로 확인해보는 최초의 넌센스 음반입니다. 1932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21편의 넌센스 음반이 나왔습니다. 콜럼비아사에서 13편, 빅타와 시에론에서 각 4편씩입니다. 반드시 넌센스란 이름이 아니더라도 스케취, 코매듸-, 풍자극, 촌극 등의 표시를 달고 있는 음반들은 모두 넌센스류에 속했습니다.
내용은 대개 기생의 사랑과 이별, 생활고, 황금만능주의 및 그러한 결혼관, 남성중심적 사고로 가득한 가정생활 등이었고, 구성방법은 작고 가벼운 웃음거리인데 가령 등장인물들끼리 서로 말꼬리를 잡는다거나 익살스런 말장난, 재치문답식의 대결, 반복적인 실수 등입니다. SP음반 한 장이 다 돌아가는데 불과 3분밖에 되지 않으니 앞뒷면 합해서 6분 안에 많은 이야기를 압축해서 빠른 말과 수다 떨기로 쏟아냅니다. 구성지고 구수한 넉살을 들어가노라면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납니다. 조선중엽 이후에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던 이야기꾼이나 판소리꾼의 전통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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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실 |
이애리수, 김선초, 강석연, 복혜숙, 신카나리아 등이 모두 그러한 경우입니다. 김연실은 1930년에 8편의 음반을 발표하는데 영화소패, 유행창가, 민요, 동화 등입니다. 1932년에는 유행소곡 7편을 비롯해서 넌센스 2편, 영화극과 풍자극을 각 1편씩 발표합니다. 1933년부터는 넌센스 취입이 부쩍 늘어납니다. 풍자희극과 폭소극 등을 포함해서 넌센스류는 무려 11편이나 됩니다. 이 해에 유행가 취입은 3편밖에 되지 않습니다.
1934년에도 넌센스류는 11편인데, 유행가는 1편에 지나지 않네요. 이듬해에도 넌센스류만 2편 발표합니다. 이 사실은 당시 대중들의 넌센스류에 대한 기호와 갈망을 말해줍니다. 김연실이 발표한 음반은 도합 53편인데, 그 가운데서 넌센스류만 29편이니 절반이 넘습니다. 김연실이 발표한 넌센스류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가정생활>(상하), <서양장한몽>(상하), <항구의 에레지>, <택시시대>(상하), <사랑의 나그네>, <속신가정생활>(상하), <익살마진 대머리>, <여천하>, <적을 사랑하리>, <수수꺽기>, <이 세상 망할 세상>(상하), <엉터리 방송국>, <모던춘향전>(제왕편)(상하), <금강밀월>, <파계>, <제3신가정>(상하), <빨내군, 숫장사>, <공설카페>(상하), <애련비련>, <따로 따로 노자>, <입힘대회>, <천국행 특급>(상하), <달님과 개구리>(상하), <창살가도>, <태자대회>, <텁석부리만세>, <유자코>, <맹꽁이이야기>(상하), <벽창호전보> 등이 그 목록들입니다.
김연실의 넌센스 음반에 같이 출연한 사람은 대표적인 만담가 신불출이 6회로 가장 많고, 배우 신은봉이 3회, 서월영이 2회, 이대근과 김영환 각 1회씩입니다. 김연실이 취입한 가요종류는 24편입니다. 유행가, 유행소곡, 유행창가, 민요 등의 종류로 24편인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르렁>, <암로(暗路)>, <적조(赤鳥)>, <주(舟)의 가(歌)>, <낙화유수>, <세 동무>, <쌍옥루>, <야자수의 음(蔭)>, <아버지>, <북국벌판>, <우는 아가씨>, <잘 잇거라 동무들>, <사랑의 노래>, <아버지>, <그대여 서러말아>, <내 마음도 나룻배>, <아리랑고개 너머가자>, <거리에서 주은 사랑>, <님의 눈물을 밋을소냐>, <달마지 가세>, <섬섬간장>, <이슬갓튼 청춘>, <도라라 물박휘>, <화성의 봄물> 등이 모두입니다.
김연실의 노래를 들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고 앳된 소녀의 처량하고도 가냘픈 느낌이 듭니다. 카랑카랑한 느낌은 들지만 정확성과 부드러움, 세련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불편함은 복혜숙이나 최승희 노래음반에서도 느껴볼 수 있지요. 그만큼 그들은 애당초 가수로 발탁된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레코드회사의 상업적 이윤추구와 연결되어 있었던 기획의도의 결과물이었으므로 다소 어설픈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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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유수> 가사지 |
노래 <낙화유수>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주제가여서 일정한 관심을 얻을 수 있었지 가창능력으로서는 김연실보다 먼저 음반을 내었던 이정숙에 비해 수용력이 다소 떨어집니다. <아르렁>은 민요 <아리랑>의 당시표기입니다. 그 시대에는 명칭이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라 <아라렁> 혹은 <아라랑>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배우로서 가수를 겸했던 김연실은 1910년 경기도 수원군 고장면 매탄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평안도 성천과 황해도 해주에서 군수를 지낸 김연식(金蓮植)이었고, 그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수원 화성의 삼일여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재학중이던 13세 무렵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두 해 뒤에는 모친마저 먼저 사망했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김연실은 주위사람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 혼인은 실패로 돌아가고 다니던 학교도 중퇴했습니다. 오빠 학근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극장 단성사에서 청년변사를 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습니다. 오빠의 추천으로 김연실은 17세에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신조아리랑>을 영화필름이 돌아갈 때 단성사에서 육성으로 불렀습니다. 이때 오빠는 나운규에게 여동생을 소개했고, 그 인연으로 김연실은 영화 <잘 잇거라>에 배우로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김연실의 첫 출연작품입니다.
1926년, 고학으로 서울 근화여학교를 마쳤지만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고 소녀가장이 되어 남동생을 돌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동생도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술을 배워 기사가 되었습니다. 훨씬 뒤의 이야기이지만 김연실의 남동생 김학성은 배우 최은희(崔銀姬)와 결혼했던 첫 남편이었습니다.
1928년 동아일보기사는 신진배우 김연실의 외모를 ‘해맑은 얼굴이 동글납작하게 귀엽고 살바탕이 맑고 하얗고 비단옷을 입어도 항상 모시적삼만치 투명하게 보이는 것’으로 좋게 평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감독과 작가를 겸했던 심훈(沈熏)은 ‘곡선, 더구나 각선미가 없어서 모던껄로서 아깝다’고 하면서 김연실을 부정적으로 평했습니다. 나운규도 김연실의 외모를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하면서도 마땅한 배역이 없어서 늘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켰습니다.
김연실이 출연했던 영화는 1928년의 <옥녀>, <삼걸인>, <철인도>, <낙화유수>, <세 동무> 등입니다. 1929년에는 금강키네마로 이적해서 영화 <종소리>에 여주인공 애경 역을 맡아 출연합니다. 영화출연도 많았지만 이 무렵 김연실의 생활은 몹시 곤궁하고 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9년 11월 중외일보 기사에 의하면 서울 수하동 5번지에서 김연실은 김소영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아리랑>,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을 상연할 때 극장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배우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약간의 돈을 받아서 생활비로 썼다고 합니다. 참으로 눈물겹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해 말 극단 토월회의 <아리랑고개> 무대에 올랐는데 이 시기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살아가던 강석연(姜石燕)과 가장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1930년까지 토월회 멤버로 석금성, 전옥, 복혜숙 등과 고생을 함께 하며 남선순회공연, 평양공연 등에 참가했습니다. 1930년에 찍은 영화작품은 최독견(崔獨鵑) 작 <승방비곡(僧房悲曲)>입니다. 이 작품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고, 이어서 영화 <화륜>,<바다와 싸우는 사람들>과 연극 <모란등기>에 출연했습니다. <모란등기(牧丹燈記)>는 신흥극장 창립멤버로 참여했던 시절의 첫 작품이었지요.
이 시기에 김연실은 이기승(李基升)이란 청년과의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를 이기승의 부모가 격렬히 반대하자 이기승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유학 후 그는 김연실과 태평양을 오가는 무려 330여 통이 넘는 러브레터를 주고받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연실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5년 동안 영화 <명일의 여성>, <어머니>, <싸구료박사>, <승방에 지는 꼿>, <임자 없는 나룻배>, <아름다운 희생>, <홍길동전>, <전과자> 등과 연극 <수일과 순애>, <아리랑고개>, <대도전>, <심청전>, <춘향전> 등에 분주히 출연하였습니다.
배우로서의 입지도 탄탄해졌습니다. 1932년에는 배우 석일량을 사이에 두고 가장 가깝던 배우 강석연과 삼각관계로 스캔들에 휘말려 언론의 비판을 받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강석연의 음독자살시도까지 발생하게 되었지요. 이기승과의 연애 중에 일어난 일이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다 <춘향전>은 아마도 배우 김연실의 정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작품 이후 김연실의 명성은 차츰 퇴조했고, 새로 등장한 후배 문예봉(文藝峯)과 노재신(盧載信)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1935년 김연실은 극단창립공연에서 유행가가수로서 노래를 부르거나 막간의 적임자, 혹은 무대극 출연자로서 영화극만담이나 넌센스 프로에 단골로 출연했습니다. 1935년 김연실은 연인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기승과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며 영화계은퇴를 선언합니다. 1936년부터는 서울 충무로의 다방 ‘낙랑파라’를 인수해서 <낙랑(樂浪)>으로 이름을 바꾸고 주인마담이 되어서 운영을 합니다.
서울의 많은 문인, 화가, 영화인 등 문화계 인사들이 <낙랑>을 그들의 아지트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김연실은 연주회와 레코드감상회 등을 자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말로 접어들면서 다방에 대한 총독부의 감시와 규제는 더욱 심해졌고, 이에 답답해진 김연실은 다방을 폐쇄한 뒤 가족들과 만주 신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1938년 남편은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만주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가다가 1940년 영화 <복지만리(福地萬里)> 촬영 팀과 합류하게 되면서 그들을 따라 서울로 되돌아옵니다.
이 무렵 만영(滿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배우 이향란(李香蘭)과도 교제를 갖습니다. 일제말 김연실의 삶은 고협(高協)의 멤버로 활동하는 친일영화인의 면모를 나타냅니다. 소녀가극단을 꾸며 북경과 신경 등지의 일본군위문공연도 다녔습니다. 1942년 창씨개명 시기에 김연실의 이름은 가네이(金井實千代)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장세정은 장전세정(張田世貞), 전옥은 송원예자(松原禮子), 김해송은 소림구남(小林久男)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8·15해방이 되자 다시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서 <노도(怒濤)>, <사랑의 맹서> 등 여러 연극무대에 출연했습니다. 김연실의 마지막 영화출연은 1949년 <돌아온 어머니>입니다. 6·25가 일어나자 김연실은 당시의 남편 김혜일(金惠一)과 함께 월북합니다. 김혜일은 화가이자 좌익언론인이었습니다. 북에서 김혜일은 <피바다>, <유격대 5형제> 등의 영화미술을 담당했고, 김연실은 영화 <정찰병>, <유격대 오형제>, <청년전위>, 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김연실의 딸 김계자(金桂子)는 외삼촌의 손에 성장하여 재즈가수가 되었습니다. 북에서 김일성의 칭찬을 받으며 인민배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김연실은 1997년 87세로 사망했습니다.
김연실의 생애를 정리차원에서 다시 더듬어보면 영화사 초기에 신일선의 뒤를 이어서 은막의 중심자리를 차지한 김연실은 1935년을 정점으로 문예봉과 노재신 등 두 후배에게 밀려나 급격히 빛을 잃었습니다. 극단 토월회에서 기량을 쌓아 태양극장과 청춘좌를 거친 김연실은 일제말 고협 시절에 결국 친일(親日)의 오점을 남기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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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실 북한시절 |
그러다가 분단이후 북으로 가서 그토록 찍고 싶던 영화에 마음껏 출연했으니 과연 자신의 소망을 충분히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김연실의 작품성은 영화, 가요, 넌센스 부문에서 그리 뚜렷하고도 강렬한 성과를 남기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어떤 장르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없었으니까요. 이런 김연실의 존재성을 한국대중문화사에서는 과연 어떤 위상으로 정리해가야 할까요?
